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공포로 석방 사건 (문단 편집) == 사건의 전개 == 1953년 6월 18일 자정을 기해 [[대한민국 육군]] [[군사경찰|헌병]][[사령부]] [[원용덕]] 사령관의 주도로 [[송효순]] 육군 헌병 부사령관과 [[홍구표]] 헌병사령부 작전처장의 기획하에 대한민국 정부와 한국군에 의한 반공 포로 석방이 강행되었다. 당시 작전 통제권이 미군으로 넘어간 다른 부대와는 달리 육군 헌병사령부는 대한민국 정부의 통제 아래에 놓여 있었다. '포로 석방'이란 이름 때문에 단순히 수용소 문을 열고 포로들을 풀어준 한낮의 평화적인 행사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전국 각지의 수용소에서 일어난 '''한밤중의 대탈주극'''이었다. 당시 포로의 수용과 감시는 UN군 측에서 맡고 있었고 당연히 UN군은 포로들을 수용소에 얌전히 가둬 둘 의무가 있었다. 반공포로 석방은 UN군과 사전 동의가 없는 대한민국 정부 측의 일방적인 석방 행위였으므로 그 과정은 사전에 몰래 언질을 받은 반공포로들이 일제히 포로 수용소를 탈출해 이를 대놓고 돕는 [[한국군]]과 [[한국 경찰]], 그리고 이에 협조하는 민간인들의 보호를 받아 도망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포로들은 [[대한민국 국군|한국군]]과 [[한국 경찰]]이 미리 나가라고 뚫어준 전기 철조망을 통해 탈출한 뒤 민간인으로 위장해 전국에 골고루 분산되었다. 한국군이 미군을 '무력으로 제압'한 뒤 포로들을 탈출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에도 미8군 사령부는 미군 방송으로 반공포로들에게 돌아오라고 하였는데 서울중앙방송국([[한국방송공사|KBS]]의 전신)에선 외국 기관(미군) 말 듣지 말라고 방송에서 말하면서 아군 방송끼리 싸우는 희귀한 장면이 연출됐다. 6월 18일부터 약 5일 동안 35,400명의 반공 포로 중 약 26,900여 명이 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당시 마산 포로수용소 경비대장인 [[한필동]] 예비역 대령의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307260032920400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07-26&officeId=00032&pageNo=4&printNo=8562&publishType=00020|증언]]에 따르면 남선전기 마산지점의 도움을 받아 수용소 내 전기를 차단시킨 후 포로들을 집단 탈출시켰다고 한다. 탈출 도중에 포로수용 책임이 있는 UN군의 사격으로 인해 61명이 사망하고 116명이 부상당했다. 나머지 8,200여 명은 미처 석방 소식을 듣지 못했거나 UN군의 진압 등으로 인해 수용소에 잔류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